제 목 백범 경호책임자’ 아버지를 추모하다(한국일보2015.7.9)
작성자 박선용 등록일 2015-08-22 오후 09:54:57 조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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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경호책임자’ 아버지를 추모하다 - 엠플러스한국일보대구본부2015.7.9.mht  

 “단칸방에 살던 시절, 아버지가 늘 저를 곁에 누이고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5남매 중 유독 저에게 각별하셨죠. 아버지는 먼 훗날 제가 당신의 추모 사업을 하게 될 줄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애국지사 박희광(朴喜光, 1901~1970). 구미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다. 그의 둘째 아들 박정용은 박희광선생추모사업회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다. 2007년에는 59세의 나이에 영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2011년 아버지의 삶을 주제로 졸업 논문을 썼다. 제목은 ‘박희광 의사, 조선독립 대한통의부의 특공대원으로서의 투쟁활동’이었다. 16세에 만주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일제 요인 암살 작전에 투입됐다가 1924년 체포돼 20년간의 옥고를 치른 과정을 담았다.
  

   
 

김구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린 아버지
“어린 시절 아버지와 목욕탕을 갔는데, 엉덩이에 총상을 발견했어요. 아버지가 직접 총알을 뽑아냈다고 하시더라구요. 감옥에서 고문당하신 이야기도 들었어요. 대나무를 칼처럼 깎아서 손톱 사이에 끼워 넣는 고문을 당하셨대요. 8번이나 혼절을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거기다 20년의 수감생활까지, 말 그대로 온갖 고초를 다 겪으셨죠.”
해방 후 김구 선생을 만나 그간의 경과를 보고했다. 김구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감격에 겨워 그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이후 백범 선생의 경호책임자로 활동하던 중 사건이 터졌다. 잠시 고향에 내려온 사이 백범 선생을 암살을 당한 것. 1949년의 일이었다.
“그 일 때문에 죄책감을 가지셨던 것 같아요. 자신이 지켜주지 못해서 김구 선생이 한창 일할 나이에 돌아가신 거라고 생각하셨거든요.”
아버지는 대구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감옥에서 배운 양장 기술로 칠성동, 교동시장에 양장점을 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백범이 20년간에 걸친 옥살이에 대한 위로금으로 2천 원을 지급했다. 당시 집 한 채 값이 100원이었으니 거금이었다.
“어린 시절 마당에 손수레 십여 대가 들어차 있는 모습이 생각나요. 사람들이 찾아와 먹고 살기 어렵다고 하면 아버지가 사비를 털어서 손수레를 마련해 주셨거든요. 아버지와 함께 거리로 나오면 풀빵 장수나 아이스께끼 장수들이 모두 꾸벅 인사를 했어요.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은 이들이었죠. 어머니는 늘 ‘너무 남들한테만 돈 쓰지 말자’고 했지만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 하셨어요.”
이리저리 도와주다보니 십여 년 만에 재산이 모두 사라졌다. 시장에 불이 나는 바람에 양장점도 잿더미가 되었다. 선생은 식솔을 이끌고 왜관 석적으로 이사를 갔다. 석적에는 처가가 있었다. 단칸방에서 아내와 다섯 남매를 거느리고 처가살이를 시작했다. 손수레를 이끌고 풀빵과 오징어를 구워 팔았다. 아내를 잃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산후조리를 잘못한데다 채독이 올라 마흔도 못 돼서 세상을 떴다. 1968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으면서 가계가 조금 나아졌지만, 선생은 2년 만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국가 유공자가 존경받아야 나라에 희망 있다
그후 박정용 씨는 공직에 들어와 칠곡군과 구미시청 등에서 근무했다. 구미시가 승격하면서 구미로 적을 옮긴 뒤 아버지의 추모 사업에 진력했다.
1972년 선산군에서 기념사업이 시작되었고, 1984년 금오산도립공원 안에 박희광 선생의 동상을 제막했다. 현재 기념관을 짓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2013년에 ‘거의’ 성공할 뻔했다. 밀양박씨 경주공파에서 구미시 봉곡동에 2천㎡의 땅을 기증했고 기념사업회가 자부담 비용 4천500만원과 국가보훈처 국비 7억 원을 확보했지만, 경북도와 구미시의 미온적인 태도로 좌절되고 말았다. 구미시는 2012년에 2억9천만 원을 들여 선생의 동상을 새로 단장했기 때문에 다시 생가 복원과 추모관 건립에 시비를 지급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박정용 씨는 “아직 불씨가 남아 있다”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반드시 기념관과 생가를 짓겠다”고 말했다.
“애국지사 박희광은 제 아버지이기 이전에 나라와 역사에 헌신한 위인입니다. 그런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기리는 것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자료 파일을 챙겨서 서둘러 길을 나섰다. 본인이 이사로 재직하고 있는 광복회에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했다. 그는 파일을 든 채로 문득 생각난 듯 광복회 내부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유공자 분들이 다들 제 아버지가 부럽다고 그래요. 이렇게 열심히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아들이 있으니 지하에서도 흐뭇할 거라면서요. 나라를 위해 헌신한 모든 분들이 후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어요. 그런 어른들을 푸대접하면 나중에 나라에 다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누가 발 벗고 나서겠습니까.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나라의 장래도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박희광 기념사업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광원 기자
권지민 인턴기자(가톨릭관동대학교 의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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