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광선생 기념관 건립 ․ 생가 복원 등 추모사업 매진,
암살 등 특수임무 활동 20년 복역, 독립투사 선친 조명.
3.1절 기념 97주년을 맞았다.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과 업적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매년 3.1절이 돌아오면 남다른 감회로 이 날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다. 애국지사 박희광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인 박정용동문(07.정외)이 바로 그렇다.
애국지사 박희광선생의 차남인 朴동문은 표류하고 있는 박희광선생의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 등 추모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故박희광선생(별칭 박상만)은 구미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손꼽힌다. 박희광선생은 1901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구한말 의병이던 조부를 따라 8살에 만주로 건너가 18살 때 만주에서 결성한 임시정부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에 자진 입대하여 특공대원으로 활동했다.
비밀암살대원으로 3인조 암살단 조직 및 특수임무 활동을 하다가 192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투옥되어 1심에서 사형선고를, 2심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20년간 옥고를 치른 후 43세 때인 1943년 출옥했다. 20년 동안 그의 청춘을 고스란히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해방이 되고 23년이 지난 후, 정부와 후손들의 노력으로 그의 재판기록이 게재된 동아일보(1924년 9월 1일자 등) 기사가 확인되면서 그의 행적이 증명되었다. 1968년 3.1절 행사에서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현재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년 후인 1970년 71세로 타계했다.
독립투사 박희광선생의 항일 활동이 초기에 인정받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작전이 극비였기 때문이다. 당시 비밀작전이나 소규모 전투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은 함께 전투에 참여한 동료의 증언이 아니면 증명하기 어려웠다.
대구 두류공원 인물동산에는 동상(흉상)이, 구미 금오산도립공원 경내에는 박희광 애국지사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3월 박희광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愛國志士朴喜光先生之像'이라는 친필휘호와 하사금 일백만원을 내렸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가난하고 극심한 생활고를 겪는 경우는 많다. 박희광선생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이렇듯 朴동문은 뒤늦게 검정고시를 거쳐 2007년 만 56세의 나이에 영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2011년 2월 졸업했다.
젊음을 조국 독립에 바친 선친의 삶을 정리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졸업논문은'박희광의사, 조선독립 대한통의부의 특공대원으로서의 투쟁활동'이란 선친의 항일투쟁 활약상을 연구했다.
"부친께서는 독립운동 한 것을 주변에 알리지 않았고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 일들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내에 발표된 자료가 거의 없어 박희광선생의 항일독립투쟁사를 발굴하여 학사논문으로 발표하게 되었다"는 朴동문은 대구한의대 국문학과 남상권교수의 도움으로 선친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을 찾게 되었단다.
朴동문은 선친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를 할 만큼 독립후손의 후예이자 선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선친의 일이지만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을 제대로 알리고 숭고한 그 정신을 계승하는데 앞장서기 위해서다.
朴동문은"선열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선현 분들의 조국애와 나라사랑 정신을 이어 받았으면 한다"고 말한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은 후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한다. 그런 어른들을 푸대접하면 나중에 나라에 다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누가 발 벗고 나서겠는가"라고 반문하는 朴동문은"기념관 건립을 성사시키는 것이 평생의 소망이다.
표류하고 있는 추모사업들이 조속히 추진될 수 있도록 지자체에서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 주었으면 한다"고 강조한다.